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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유통기한 지난 약을 그냥 종량제봉투에 버려도 된다고 오랫동안 믿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남은 시럽은 싱크대에 흘려보낸 적도 있었으니까요. 장마가 끝나던 어느 주말, 거실 서랍 안쪽에서 꺼낸 낡은 종이상자 하나가 그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아준 계기가 됐습니다. 폐기의약품은 단순 쓰레기가 아니라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킬 수 있는 화학물질입니다. 버리는 방법부터 보관 습관까지, 제가 직접 겪으며 알게 된 것들을 정리했습니다.

서랍 속 낡은 약상자, 그날의 분리배출 소동
에어컨을 틀어놓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던 그날, 거실 서랍 맨 안쪽에서 종이상자 하나가 나왔습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예전에 감기로 병원에 다녀왔을 때 처방받은 알약, 근육통 때문에 사둔 파스, 사용하다 남긴 연고, 그리고 언제 개봉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안약까지 뒤섞여 있었습니다.
하나씩 날짜를 확인해 보니 대부분 유통기한이 이미 한참 지나 있었습니다. 어떤 알약에는 3년 전 날짜가 적혀 있었고, 처방약은 봉투째 접혀 있는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몸이 나아졌다는 이유로 약을 끝까지 복용하지 않고 남겨두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종량제봉투에 넣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약도 결국 쓰레기 아닌가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해 보니 폐기의약품, 즉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쓰다 남은 의약품은 일반 쓰레기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때서야 제대로 알았습니다. 여기서 폐기의약품이란 가정에서 발생하는 먹다 남은 약, 유통기한 경과 약, 변질된 약 등을 통칭하는 말로, 환경부는 이를 생활 속 유해 폐기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출처: 환경부).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전에 모르고 알약을 일반 쓰레기에 버린 적도 있었고, 시럽은 싱크대에 그냥 흘려보낸 적도 있었으니까요. '그때는 몰랐으니까.'라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이번만큼은 제대로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단단히 들었습니다.
알약·가루약·물약, 제형별 분리배출 방법
제형(劑形)이란 약의 형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알약인지, 가루약인지, 액체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인데요. 제형에 따라 수거함에 넣기 전 준비 과정이 조금씩 달라서 처음에 헷갈렸습니다. 제가 직접 해보니 핵심은 딱 하나였습니다. 내용물이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도록 밀봉하고, 부피를 최대한 줄이는 것입니다.
알약과 캡슐약은 PTP 포장에서 꺼내는 작업이 먼저입니다. PTP 포장이란 알약을 하나씩 눌러 꺼낼 수 있도록 플라스틱과 알루미늄 박막으로 감싼 낱알 포장을 말합니다. 이 포장재는 재활용품으로 따로 분리배출하고, 알약만 깨끗한 비닐봉지에 모아 입구를 묶어서 수거함에 넣으면 됩니다. 약국에서 조제한 경우 종이봉투에 담겨오는 경우가 많은데, 봉투는 종이 재활용으로 처리하면 됩니다.
가루약은 반대입니다. 포장지를 절대 뜯으면 안 됩니다. 제가 처음엔 한데 모으려고 뜯으려다 약봉지 하나가 찢어지면서 가루가 온 바닥에 날린 경험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처방받은 포장 상태 그대로 큰 비닐봉지에 모아 입구를 단단히 묶어서 가져갑니다.
물약과 시럽제는 수질 오염과 가장 직결되는 제형입니다. 싱크대나 변기에 그냥 버리면 하천과 지하수까지 오염될 수 있습니다. 남은 시럽은 새지 않는 플라스틱 병 하나에 모두 쏟아부어 뚜껑을 꽉 잠근 뒤 수거함에 넣고, 빈 약병은 깨끗이 헹궈 플라스틱으로 분리수거합니다. 연고와 안약도 내용물을 짜내거나 따를 필요 없이 용기 그대로 수거함에 넣으면 됩니다.
- 알약·캡슐: PTP 포장재 분리 후 알약만 비닐봉지에 밀봉
- 가루약: 처방 포장 그대로 큰 봉지에 모아 밀봉
- 물약·시럽: 플라스틱 병 한 곳에 모아 뚜껑 잠금, 빈 병은 재활용
- 연고·안약: 용기 통째로 뚜껑 닫은 채 수거함 투입
동네 폐기의약품 수거함 찾는 법
약을 정리한 뒤 처음 간 곳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약국이었습니다. 입구 한쪽에 '폐기의약품 수거함'이라고 적힌 통이 놓여 있었고, 약사님께 여쭤보니 포장재는 따로 빼고 약만 넣으면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비닐과 종이상자를 정리한 뒤 약만 수거함에 넣었습니다. 몇 분 걸리지 않는 일이었는데 마음이 생각보다 훨씬 후련했습니다.
다만 모든 약국이 수거함을 운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경험상 양이 많을 때는 약국보다 보건소가 더 확실합니다. 보건소는 상시 수거함을 운영하기 때문에 언제 가도 부담 없이 넣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에 따르면 전국 보건소와 지정 약국, 주민센터 등이 폐기의약품 공식 수거 거점으로 지정·운영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
최근에는 주민센터(동사무소) 민원실이나 아파트 단지 내 분리수거장에도 수거함이 설치된 곳이 많아졌습니다. 생활 쓰레기 버리러 갈 때 같이 처리할 수 있어서 동선이 많이 줄었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분리수거장에도 작년부터 수거함이 생겼는데, 그전까지는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정확한 위치를 한 번에 확인하고 싶다면 각 지자체 홈페이지 검색창에 '폐기의약품'을 입력하면 설치 장소 목록이 나옵니다. 지역마다 운영 방식이 달라 처음엔 어디로 가야 할지 헷갈렸는데, 이 방법이 가장 빠르고 정확했습니다.
오래된 약이 쌓이지 않는 보관 습관
그날 대청소를 마치고 깨끗해진 서랍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맺혔습니다. 집에 약이 많다는 게 건강을 잘 챙기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약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날 버린 약 중에서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손대지 않은 것들이 절반 이상이었습니다.
처방의약품은 유통기한 기준부터 다릅니다. 처방의약품이란 의사의 처방전 없이는 구입할 수 없는 전문의약품을 말하는데, 상자에 유통기한이 적힌 일반의약품과 달리 복용 기간이 곧 유통기한입니다. 처방받은 일수가 지난 약은 성분이 변질되거나 효력을 잃을 가능성이 있어 보관 의미가 없습니다.
개봉 후 유통기한이 급격히 줄어드는 제품도 있습니다. 점안액, 즉 안약이 대표적입니다. 점안액이란 눈에 직접 투여하는 액체 의약품으로, 개봉 후 한 달 이내 사용이 원칙입니다. 연고류도 개봉 후 6개월을 넘기면 성분 변질 우려가 있습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새 약을 뜯을 때 상자나 튜브 겉면에 네임펜으로 개봉 날짜를 적어두는 것만으로도 나중에 버릴 타이밍을 훨씬 쉽게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계절이 한 번 바뀔 때마다 약통을 10분쯤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오래된 약을 솎아내고, 부족한 상비약을 확인하는 이 짧은 시간이 약통을 깔끔하게 유지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약은 직사광선이 닿지 않고 습기가 없는 서늘한 실온에 보관하는 것이 기본이며, 냉장 보관이 필요한 약은 별도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비타민이나 홍삼 같은 건강기능식품도 폐기의약품 수거함에 버려야 하나요?
A. 아닙니다. 비타민, 유산균, 홍삼 같은 건강기능식품은 의약품이 아니라 식품으로 분류됩니다. 유통기한이 지났다면 내용물은 음식물 쓰레기로, 용기는 재질에 따라 재활용품으로 분리배출하면 됩니다. 폐기의약품 수거함은 의사나 약사를 통해 공급된 의약품 전용이라고 이해하면 구분이 쉽습니다.
Q. 약국에 폐기의약품을 가져가면 눈치가 보이는데, 그냥 일반 쓰레기봉투에 버리면 벌금이 나오나요?
A. 현재까지 일반 가정에서 약을 잘못 버렸다고 해서 즉각적인 법적 벌금이 부과되는 규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토양과 수질 오염, 생태계 교란을 막기 위한 환경 보호 차원의 약속이기 때문에 올바른 분리배출을 권장합니다. 요즘은 주민센터나 아파트 분리수거장 수거함도 잘 갖춰져 있어서 약국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제 경험상 아파트 수거함이 가장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Q. 처방받은 약인데 며칠 치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것도 수거함에 버려야 하나요?
A. 네, 처방 일수가 끝난 약은 유통기한이 지난 것과 동일하게 봐야 합니다. 조금 남았다고 종량제봉투에 넣거나 싱크대에 버리기보다는, 다음에 약국이나 보건소에 들를 때 함께 가져가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남은 처방약을 따로 작은 봉지에 모아뒀다가 한 번에 가져가는 방식을 쓰고 있습니다.
Q. 안약이나 연고처럼 튜브·통에 든 약은 내용물을 짜내고 버려야 하나요?
A. 짜낼 필요 없습니다. 연고는 튜브 그대로, 점안액(안약)은 뚜껑을 꼭 닫은 채 용기 그대로 수거함에 넣으면 됩니다. 내용물을 억지로 짜내다가 주변에 묻거나 흘리면 오히려 번거로우니, 그냥 통째로 가져가는 것이 가장 깔끔합니다.
결론
서랍에서 낡은 약상자를 꺼내던 그날의 소동이 저에게는 꽤 쓸모 있는 전환점이 됐습니다. 폐기의약품을 올바르게 버리는 일은 거창한 환경 운동이 아니라, 약국이나 주민센터에 잠깐 들르는 수준의 아주 작은 행동입니다. 그 작은 행동 하나가 토양과 수질을 지키는 데 실제로 기여한다는 것을 직접 알게 된 뒤로는 더 이상 귀찮다고 미루지 않게 됐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약통을 10분만 열어보는 것, 새 약을 뜯을 때 개봉 날짜를 적어두는 것. 이 두 가지 습관만 들여도 오래된 약이 쌓이는 일은 크게 줄어듭니다. 이미 모아둔 약이 있다면 가장 가까운 약국이나 보건소, 주민센터를 한 번 들러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간단하고, 끝내고 나면 서랍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납니다.